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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펌] 부재의 아이디어


부재의 아이디어


공갈빵을 씹으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빵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공갈빵의 주된 아이디어는 빵이 아닌 빵의 부재를 먹는 것이다.

데이트는 두 존재가 만나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는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의 일부잖아'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존재가 아닌 부재에 주목하는 것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역설적이게도, 부재에는 엄연한 존재감이 있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던가. 가야금 소리가 진양조로 느리게 흐를 때, 음과 음 사이에는 바람이 드나든다. 그것은 현을 튕기는 소리를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이의 침묵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 그 침묵, 즉 소리의 부재는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음악적 요소이다. 황병기 선생은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도 음악적인 사람이다'라고 했다. 작년 많은 관객이 다녀간 음악 레이블 ECM의 전시 제목은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다시 말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침묵이라는 것이다. 소리의 부재를 소리로 정의하는, 인식의 전환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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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만 있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


영화 <어바웃 타임>과 <그녀>에는 똑같은 장면이 있다. 완전히 깜깜한 화면에 음성만 들리는 장면이다. 시각매체인 영화에서 영상이 부재하자 우리는 온전히 소리와, 그것을 통해 느껴지는 그들의 감정 흐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두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장면이 없는 장면인 것이다.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숫자인 '0'은 인도의 승려들이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0'의 발견은 수학이 고도로 발전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0'이란 없음을 뜻하는 수이다. 수의 부재를 가리키는 수가 생긴 것이다.

아름다운 토성의 고리에는 벌어진 틈들이 여러 개 있다. 그중 가장 크게 벌어진 부분이 카시니 간극Cassini division이다. 1675년 이것을 발견한 장 도미니크 카시니의 이름이 붙어있다. 고리가 형성되지 않은 곳, 즉 고리의 부재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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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은하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아웃백이라 불리는 호주의 오지다. 별이 무척 환하게 빛나기 때문에 은하수 사이사이의 어두운 부분도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호주의 원주민들은 이 검은 무늬에 '에뮤'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뮤는 호주 고유종인 커다란 새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별에 이름을 붙이고 별자리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그들은 별이 아닌 별의 부재에서 새를 본 것이다. 빛나는 별만 보이는 세상보다는 그 옆을 나는 검은 새도 같이 보이는 세상이 아마도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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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에셔의 '낮과 밤'



<출처>

http://www.huffingtonpost.kr/hana-kim-/story_b_5649782.html?ncid=tweetlnkushpmg00000067#